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이브러햄 링컨 (문단 편집) == 기타 == * 깡마른 인상으로 인해 잘 매치가 되지 않지만, 힘이 엄청난 장사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막노동]]을 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 이와 관련해 동네 불한당이 시비를 걸어온 일화가 나름 유명하다. 링컨은 시비를 피할 수 없어서 결국 1:1 싸움이 벌어졌는데, 많은 구경꾼들이 키는 크지만 깡마른 링컨보다는 다부진 체격의 불한당의 승리를 점쳤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링컨이 상대를 가볍게 발라버렸고, 이후 링컨과 불한당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전말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료를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1831년, 링컨은 일리노이 주 뉴 세일럼으로 이사하였다. 이 동네에는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이라는 동네 젊은이들의 패거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항상 패거리의 리더인 잭 암스트롱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싸움꾼이라 자랑하고 다녔다. 당시 링컨은 덴튼 오풋이라는 사람의 가게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풋은 '링컨이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강한 사내'라고 주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잭 암스트롱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링컨에게 한 판 붙자고 제안을 했고, 링컨은 승낙했다. || [[파일:external/rogerjnorton.com/armstrong.jpg|width=100%]] || ||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Clary's Grove Boys)의 리더 잭 암스트롱 || 두 사람이 붙은 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왁자지껄 떠들고 구경을 하며 돈내기를 했다고 한다. 링컨은 키 193cm에 몸무게 80kg 가량 되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훨씬 키가 작지만 '황소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진 잭 암스트롱에게 걸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서로 탐색전을 펼치다가 서로 끌어안고 용을 썼으나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암스트롱이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암스트롱이 힘에서 밀리자 링컨은 암스트롱의 목을 잡고 팔을 뻗어 들어올린 채 암스트롱이 꼬마인양 흔들어댄 후 내동댕이쳤다. || [[파일:external/rogerjnorton.com/fight.jpg|width=100%]] || || '''암스트롱에게 [[초크슬램]][* 링컨은 단순히 나무꾼 같은 막노동만 한게 아니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 일리노이 주에서 12년간 패배를 단 한번밖에 안했을 정도로 우수했던 [[프로레슬러]]였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무술에 단련된 몸이었다.]을 먹이는 링컨''' || 이 모습을 본 '클래리즈 그로브' 패거리는 분노하여 링컨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링컨은 오풋의 가게 쪽으로 물러나 가게 벽을 등지고서는 '전부 상대해 줄테니 한 놈씩 덤비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링컨의 모습을 본 잭 암스트롱은 그의 용기에 크게 감동하여 패거리를 만류하였고, 링컨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며 "이봐, 이제는 에이브(Abe)가 우리 중 최고다!"라고 외쳤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 암스트롱은 링컨의 친구 겸 정치적 후원자가 되었다. 링컨이 정치권에 데뷔할 때부터 자금이 부족했는데 암스트롱이 자신의 갱단을 이끌고 번 돈으로 링컨을 계속 후원해 줘서 링컨이 나중에 대통령이 될 때까지도 후원을 지속했다고 한다. 이후 백악관에서 링컨과 암스트롱이 이 때 싸움을 회고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 상술한 잭 암스트롱의 아들 더프는 장성한 후 살인범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에 링컨은 더프의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더프에게 무료 변호를 해 주어 더프의 누명을 풀어줬다.[* 핵심 증인인 목격자가 사건 당일 보름달이 뜬 탓에 더프가 나무들이 많은 숲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멀리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의 일기예보지에서는 그 날 초승달이 떴다고 나와 있었다. 즉 밝은 달빛 아래서 더프의 범행을 목격했다는 진술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 링컨은 이 사실과 나무들의 위치를 근거로 들어 현장을 볼 수 없었을 거라 주장하며 증인을 몰아붙였고, 증인은 결국 위증을 했음을 자백했다.] 이 재판은 변호사 시절 링컨의 행적 중 유명하게 꼽히며, '달빛 사건'이라 하여 미국의 어린이들이 이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어 발표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프로레슬링]]계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이름높았다. 단순히 후일 대통령이 된 것 때문에 커리어가 덩달아 유명해지거나 과대평가된 게 아니라, 12년 동안 300~500 경기를 치르면서 단 한 번밖에 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링컨 연구가들은 이 '1패'에 분명한 근거는 없다고 하지만, 승률이 무시무시하게 높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한 (충분히 넓은 지역이기는 하나) 링컨의 커리어는 자신의 출신지와 그 주변의 주를 돌며 쌓은 것으로, 연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쌓은 전국구 커리어가 아니라는 한계는 있다.][* 하지만 애시당초 프로레슬링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전국구 프로레슬링이 등장한 것 자체가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단체인 [[NWA(프로레슬링)|NWA]]가 설립되고 나서였다. 그 이전에는 유랑 서커스에서 돌아다니면서 흥행을 하거나 아니면 지역구 프로모터가 운영하는 지역 기반 프로레슬링 단체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교통수단이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 거꾸로 '그의 스포츠 커리어가 시들해지자 정치 커리어가 꽃피기 시작했다'라고 표현한 역사학자가 있을 정도로 링컨은 정치 인생에 지지 않는 화려한 레슬러 인생을 보냈다. 명예의 전당에서는 링컨의 체구에서 오는 긴 리치와 완력을 연승의 비결로 꼽고 있는데, 그 괴력은 19세의 나이로 자신의 이복형제의 바지선에서 강도들을 강에 가볍게 번쩍 들어 던져버리고, 상술했던 것처럼 세월이 지난 후에도 동네 깡패 암스트롱을 가볍게 붕붕 휘둘러 메다꽂을 정도였다. 이 당시의 프로레슬링은 술집 언저리에서 한 판 붙은 다음에 경기가 끝나면 [[마산아재|주변에 운집해 있던 팬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식]]의 다분히 엉망진창인데다 터프한 스포츠였고, 현대와는 다르게 승패를 정해놓고 각본대로 하는 엔터테인먼트도 아니어서[* 물론 현대에도 각본대로 움직이기는 하되, 기술 자체는 진짜로 거는 것이라서 오늘날의 프로레슬러들도 일반적인 운동선수들처럼 허구헌 날 갖가지 부상을 달고 산다. 심지어 일부 스페셜 매치는 옛날마냥 각본도 안 짜고 진짜로 승패를 가리는 식으로 치를 정도다.] 선수들이 죽기살기로 상대를 넘어뜨려야만 했다. 링컨은 당시의 대세였던 칼라 앤 엘보[* 아일랜드에서 유래된 전통 레슬링으로, 옷을 착용하고 주로 잡기 위주의 기술을 사용한다.]의 방식을 거스르고 상대를 괴력으로 집어던져버리는 호쾌한 스타일을 구사했다고 한다. * 젊은 시절 링컨의 벌목 실력 또한 당시 자주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실제로 링컨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그림 중에는 그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모습이 많다. 링컨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몇 배 이상 빠르게 엄청난 도끼질로 나무를 넘겨대던 괴력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듯. 저 아래 "도끼질로 뱀파이어 때려잡는 링컨"의 괴랄한 상상은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것.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라는 영화가 몇 년 전 개봉했는데,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듯 하다. 인자한 빼빼마른 할아버지 같은 링컨 대통령이 사실 젊었을 적에는 엄청난 파워캐릭터였다는 것이 소소한 아이러니.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fc654f7ab15ea64e01292bfa526b44d.jpg]] 대충 이런 이미지. * [[게이]] 의혹이 있어 [[Gay Bar]]의 뮤직비디오는 1863년 [[백악관]]을 무대로 하는 것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한 근거는 딱히 없다. 동성애 이론 전문가 C.A. 트립 교수는 링컨이 결혼생활도 그저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였으며, 젊은 남성들과의 교제를 즐겼다고 주장했다. LGBT 옹호로 유명한 극작가 래리 크레이머가 미국인들(The American people)이라는 책에서 링컨을 게이였다고 소개했지만[* 이 책에서는 링컨 뿐 아니라 [[조지 워싱턴]]이나 [[마크 트웨인]] 등도 게이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링컨이든 트웨인이든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사료로 교차 검증되는 것이 없어 그저 낭설로 보인다. 링컨은 실제로 젊었을 때는 사창가도 자주 다녔으며, 사랑하는 연인들도 있었기에 하다못해 양성애자면 몰라도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은 적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문서로. 다만 파고보면 상당수는 [[도시전설]] 수준으로, 예를 들어 많은 실패와 고난 속에 역경을 헤쳐온 링컨과 달리, 케네디는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정치 인생도 꽤나 탄탄대로였다. 다만 케네디도 아예 역경이 없었던건 아닌데, 우선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적도 있었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 [[노무현]] 前 대통령이 링컨 전기를 쓴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링컨과 노무현 둘다 양국의 16대 대통령이다.] 심지어 링컨박물관장의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링컨 전기를 쓴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한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2/22/0200000000AKR20161222024400072.HTML?input=1195m|#]] 책 제목은 2001년 집필한 '노무현이 만난 링컨'. 실제로 워싱턴 D.C. 포드 극장 박물관에 특별 전시되어 있다.[[http://news.joins.com/article/17604959|#]] * 그림 실력 향상을 위해 [[소묘]]를 할 때 애용되는 모델. 워낙 얼굴의 요철이 강해 윤곽이 두드러지는지라 해칭하는 맛이 일품이다. * [[베이컨]]을 매우 좋아하여 즐겨 먹었다. 또한 [[대식가]]이기도 했다. * 대통령이 되기 전에 [[미국-멕시코 전쟁]]을 반대했던 전력이 있다. 이미 멕시코의 영토인 곳을 점령하는 것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이라는 얘기인데, 당시 그런 논리로써 침략전쟁을 반대한 사람이 링컨만이었던 건 아니지만,[* 당장 링컨 휘하에서 남북전쟁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율리시스 S. 그랜트도 군인이면서 전쟁 자체는 싫어했던 인물답게 미국-멕시코 전쟁에는 저주와도 같은 혹평을 했다.] 그 때 전쟁을 해서 텍사스~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멕시코에게서 빼앗아왔기 때문에 미국은 서해안으로 진출하고 최강대국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게다가 이 신영토를 노예주로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서 남북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니까, 만약 남북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개인적으로 링컨은 영웅이 되지도 못한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십몇년 빨리 되어서[* 물론 이 때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미국-멕시코 전쟁]]을 막았다면 그는 최악의 대통령 순위표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자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방문해 군인들과 밤새 놀고 이야기 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당시 남부연합 해군의 가장 강력한 철갑군함이었던 메리맥(Merrimack) 함[* 남군측이 붙인 정식 함명은 CSS 버지니아.]이 버려져 있던 한 해군 기지를 공략하는 군대를 시찰갔다. 가서 지휘관에게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자 대장은 "수심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링컨은 흔쾌히 "그럼 여기 나하고, 육군장관하고 재무부장관하고 가서 확인하고 오겠네." 라고 말했고, 장병들의 극구 반대에도 밤에 몰래 '''미군 최고 수뇌부 세명이''' 가서 수심을 확인하고 아침에 멀쩡히 돌아왔다. 이후 이 이야기는 링컨의 모험담 중 링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 남북전쟁 당시 당장 전쟁을 그만두라는 어명을 내린 자칭 미국의 황제 [[노턴 1세]]에게 소환장을 받은 바 있으나 가지 않았다. * 과거 링컨 관련 이런 유머글이 돈 적이 있었다. >공부는 안하고 망나니 짓만 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훈계를 했는데, "에이브러햄 링컨이 네 나이 때는 무엇을 했는지 아니? 열심히 독서하고 공부했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 왈, "아, 그 사람 저도 알아요. 아버지 나이 때는 대통령이었잖아요!" 다만 이게 여러 버전이 있어서 링컨이 아니라 존 F.케네디를 넣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40대라면 케네디가 딱(링컨은 51살에 대통령이며 케네디는 44살에 대통령이 되었으니)이다. 아빠와 아들을 직장 상사와 부하로, 링컨을 [[고르바초프]]로 바꾼 버전도 있다. *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라서 그런지 워낙에 대중적인 인지도와 명성이 드높은 대통령이라서 그런지 어쨌는지 링컨은 [[백악관]]에 가장 자주 출몰하는 [[유령]]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이런 류의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암살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서 혼이 이승을 못 떠나고 있다는 떡밥으로 써먹히는 중. 진실 여부는 그렇다치고 백악관은 건물이 낡아서 그런지 유령에 대한 목격담이 한둘이 아닌데 목격자들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독 링컨의 유령을 봤다고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백악관에는 링컨의 침실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문과 링컨이 당시 사용한 책걸상 및 침대 등이 놓여 있는데 [[윈스턴 처칠]]은 귀빈으로써 백악관에 묵을 당시 이 링컨 침실에 묵었다가 링컨의 유령을 보았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 당시 처칠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올누드로 담배를 피우던 중이었는데, 벽난로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링컨의 유령을 보았다. 처칠은 "좋은 저녁이군요, 대통령 각하. 그런데 지금은 제가 좀 경황이 없는 상황이라서..."라고 했더니 링컨이 웃으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물론 [[뻥카]]성 일화. 그런데 처칠은 노출광이었는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나기로 했는데 당시 처칠은 샤워중이었다. 문제는 갑자기 대통령이 방문한 것. 처칠은 일단 수건으로 중요한 부위만 대충 가리고 나와 대통령을 맞이했는데 '''감싸고 있던 수건이 떨어져버렸다.''' 당연히 처칠은 올누드 상태가 되버렸고 상황이 뻘쭘해질 찰나 기지를 발휘하여 "대통령 각하께 영국 총리의 거짓없는 진실된 모습을 보여드려 영광입니다. 혹시 제 모습이 불편하신지?" 라고 물었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럼 진실어린 대화를 해볼까요?" 라고 답했다는 나름 훈훈한 이야기.]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당시 백악관 보좌관들 중 몇몇은 링컨의 유령을 목격하여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간 적이 있으며, [[FDR]]의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은 유령을 보진 못했지만 링컨의 존재를 느꼈다고 증언했다.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백악관에 묵을 당시 한밤중에 누가 노크를 하길래 문을 열었다가 링컨의 유령이 서있는 모습을 보고 기절했다는 소문도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밤새 링컨 유령의 악몽에 시달렸고, 심지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뒤 링컨의 유령을 보기도 했다고. 결국 빡친 나머지 백악관을 불도져로 밀어버리고 리모델링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이유라기 보다는, 2층 피아노 무게를 천장이 못 견디고 무너져 1층에 피아노 다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건물이 노후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콘크리트 재질로 보수한 이후로는 악몽도 꾸지 않고 튼튼한 관저에서 편안한 잠을 누렸다고 한다.] * 링컨의 사진 중 하나는 [[합성]] 사진이다. [[파일:external/twistedsifter.files.wordpress.com/abraham-lincoln-doctored-photoshopped-john-calhoun-body.jpg]] 좌측 사진은 사실 링컨의 풍모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당당한 체구의 정치인의 사진에 링컨의 머리만 붙인 것이다. 합성된 정치인은 [[존 칼훈]]인데, 존 칼훈은 부통령을 두 차례나 지냈을 정도의 유명 정치인이지만 주의 분리와 독립, 노예제도 유지를 지지했던 남부 옹호세력의 거두였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8864a7eac4ac2b2c2bbf3081bbeace8.gif]] [[데스마스크]]가 있다. *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암살하고 난 후 "폭군의 말로는 언제나 이렇다." 라는 의미의 라틴어 "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고 한다. [[버지니아주]]의 표어이기도 하다. * 링컨이라는 이름값 때문인지 상표명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링컨(자동차)|링컨]]이라는 미국의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가 그 예시.[* 제38대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의 이름도 [[포드 모터 컴퍼니|미국의 한 자동차 제조사]]의 상표로 쓰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제럴드 포드는 링컨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데다가 그의 전임자인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고, 그의 재임 시기는 이미 포드가 설립되고 난 후로도 한참 후였다. 무엇보다도 포드는 링컨과는 달리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표가 아닌, 설립자인 [[헨리 포드]]가 자신의 성씨를 따서 만든 상표이다. 다만 제럴드 포드의 포드와 헨리 포드의 포드 둘 다 스펠링이 Ford로 같기는 하다. 여담으로 현재 포드와 링컨은 같은 포드 모터 컴퍼니 내의 계열사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자동차]]와 [[제네시스(자동차)|제네시스]] 같은 관계.] * 놀랍게도 현상 수배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는 링컨이 뭔가 잘못했다는게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현상 수배범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람이 링컨의 외모와 닮았다는 것. 이 얘기는 [[스펀지(KBS)|스펀지]]에서도 다룬 바 있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주인공인 장고가 처음 처리하여 부적으로 들고다니는 현상수배범의 포스터로도 다루었다. * [[산마리노]]는 링컨에게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였다. 수여 이유는 공화국의 원칙에 기초한 정부에 대해서 안전, 지속적인 관리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https://history.state.gov/countries/san-marino|#]] * 에이브러햄 링컨의 혈흔이 남아있는 전보와 머리카락 뭉치가 경매에서 8만1천달러(약 9천600만원)에 팔렸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882113?sid=104|#]] * 링컨과 관련된 괴담 중 하나인데, 링컨이 죽기 며칠 전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이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울고 있냐고 하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예지몽|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어요!]]'''하면서 울고 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4월 15일]] 링컨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총에 맞아 서거했다.]] * 한반도에서는 이 사람 재임기에 왕이 [[철종(조선)|철종]]에서 [[고종(조선)|고종]]으로 교체되었다.[* 다만 이때는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절이었고, 제대로된 집권은 미국이 그랜트 재임 시절이였던 1873년에 시작되었다.] * 의외로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찰스 섬너]]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9월 [[메리 토드 링컨]]이 링컨의 전기 작가 윌리엄 H. 헌든(William H. Herndon)과 인터뷰를 했는데 메리는 섬너와 링컨이 "서로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친구였다(great chums after they became acquainted)”고 말했으며, “(링컨이) 죽을 무렵에는 남자 아이들처럼 가까이 지냈다(like boys during his last days)”고 말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끝나서 같이 기뻐했다(were so glad the war was over)"라고 말했다. [[http://www.mrlincolnandfriends.org/members-of-congress/charles-sumner/|#]] * 스페인 내전 당시, 미국에서는 링컨의 이름을 딴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이 형성되어, 공화파 진영을 도왔다. 규모는 대략 2,500명 정도로 유명한 소설가인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이쪽 소속으로 내전에 참전했다. * 2008년에는 링컨의 16대손이라고 자칭하는 당시 뉴저지 네츠 치어리더 보니 링컨의 얘기가 [[https://www.joongang.co.kr/article/3516182#home|언론에 보도되어]] 잠깐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조상이 태어난 통나무집의 나뭇조각을 가보로 지녀왔다고 한다. *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Lincoln and Liberty]]라는 선거송을 이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